Times Square Church Pulpit Series Multilingual Web Site with sermons by David Wilkerson, pastor of Times Square Church, New York City

- A Cry Without a Voice -

소리 없는 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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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Wilkerson
August 19,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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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7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커다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극적인 장면은 단 다섯 절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마가복음 7:31-35).

이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데가볼리 해안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귀먹고 혀가 돌아가지 않는 한 사람과 마주치셨습니다. 그 사람은 말을 할 수는 있었습니다만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을 군중들로부터 떼어내어 따로 데려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 앞에 서서 손가락을 그의 귀에 대셨습니다. 그리고는 침을 뱉고 그의 혀를 만지셨습니다. 마침내 한마디로 말씀하셨습니다. "열리라." 그 순간 갑자기 그 사람은 똑똑히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일이 있기 전 예수께서는 어떤 여자의 귀신들린 딸을 구원해주셨습니다. 말씀만으로 예수님은 악령을 그 소녀에게서 쫓아내셨습니다. ‘왜 이러한 기적이 성경에 기록되었을까? 이 땅에 계실 때 주님의 생애에 일어났던 수많은 장면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일까?’ 저는 궁금했습니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커다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믿습니다. 사탄과 질병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기적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드러냄으로 예수님이 육체를 가지고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로서 제시되었습니다. 또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켜주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들은 위에서 언급된 이유와 더불어 보다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가 하신 모든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오직 아버지의 인도하심을 따라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의 삶에서 모든 사건은 종말을 맞이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교훈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0:11).

마가복음 7장의 기적은 단지 수십 세기 전 살았던 한 사람이 치료된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기록된 다른 모든 사건들과 같이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밭에 감추어진 보화의 비유처럼 우리는 그 의미를 열심히 캐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기적이 오늘날의 세대를 향한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를 드러낸다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에 대한 질문으로 인해 무척이나 당혹스럽습니다. 이것은 꽤 오래된 의문입니다. 젊은이들에 관해 타오르는 질문들은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저는 앞서 언급한 기적 이야기가 그 질문들에 대부분 해답을 줄 수 있는 진리의 계시를 담고 있다고 믿습니다.

먼저 저는 예수님께 이끌려온 이 사람, "귀먹고 어눌한 자"가 누구인지 묻고 싶습니다(마가복음 7:32). 성경은 우리에게 이 사람의 이름을 말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사람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사람을 나타내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을 대표하는 것입니다(시편 115:6). 물론 이 시편의 구절은 영적 상태를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귀가 먼 상태, 하나님의 진리를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상태 말입니다.

저는 귀먹고 혀가 돌아가지 않아 말이 어눌한 이 사람이 오늘날의 젊은이들 대다수와 같다는 인상을 깊이 받았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난 자녀들에게도 이 말씀이 해당된다고 저는 믿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소화시킬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매일 파티에만 참석하고 말썽만 부리는 아이들이 아니라 부모님과 어른들을 존경하고, 순종적인 착한 자녀들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마약이나 술, 섹스나 비도덕적인 일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는 극도로 소극적입니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사역을 해오면서 오늘날의 세대처럼 하나님의 일들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세대는 처음 봅니다.

저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듯 영적으로 귀먹은 젊은이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저는 그토록 훌륭한 청년들, 특별히 사랑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에게 양육된 자녀들이 예수님에 대해 왜 그렇게 소극적인가라는 질문을 해왔습니다. 그들은 죄를 징책하는 설교를 듣습니다. 사랑의 복음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반응이 없습니다.

저는 제 손자 손녀 가운데서 이런 상태를 발견하고는 무척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은 제 설교를 들었고 제가 거룩한 눈물과 성령의 권위를 가지고 설교하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종종 저는 이렇게 혼자 생각했습니다. "아마 오늘은 성령께서 그들의 미지근함과 소극적인 마음을 녹이실지도 몰라. 하나님께서 이 젊은 아이들의 마음을 만지셨다는 증거로 나는 어쩌면 이들의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될 수도 있을 거야."

저는 무척이나 의아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귀가 먹었나? 아니면 하나님을 거부한 것일까? 들을 수 없도록 스스로 귀를 닫아버린 것일까?" 저는 이 착한 아이들이 예수님을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생각들과 씨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열정이라곤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한 자들도 미지근한 상태로 남아 있다면 결국 지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신 바 있습니다(요한계시록 3:16).

이와 유사한 상태를 교회를 다니는 많은 남자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이며, 자신의 부인에게 충실한 남편이며,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이며, 가정의 책임을 다하는 훌륭한 가장들입니다. 그러한 남편을 둔 아내들은 남편과 함께 교회에 올 때면 '아마도 오늘은 그이의 마음이 변화될지도 몰라.' 하는 기대감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이들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오늘 예배 참 좋았어. 다음에 또 같이 올게."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악하지도, 음란하지도, 부도덕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존경하는 수준에만 계속 머무른다면 올바른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에게도 이런 친구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저를 매우 아끼고 사랑하며 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습니다. 가끔씩 저희 교회에 올 때면 이들은 늘 제 설교를 칭찬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해 수없이 많은 설교를 들었기 때문에 그 주제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소극적이고 수동적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아올 때의 모습 그대로 변화되지 않은 채 떠납니다.

그 사람들 모두 귀가 있습니다. 하지만 듣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귀머거리입니다.


이 사람이 듣고 말하기 위해서는 지구상에
단 하나의 소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 귀먹고 혀가 굳은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만나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바울이 이야기하는 "귀가 가려운…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는"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디모데후서 4:3-4). 이 자는 "혼미한 심령과 듣지 못할 귀"를 가진 자도 아니었습니다(로마서 11:8). 그는 사도행전 28장 27절에 기록되어 있는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은" 자들과도 같지 않고, 스덴반을 돌로 쳤던 "귀를 막은" 자들과도 다릅니다(사도행전 7:57).

사실 이 사람은 듣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치유받기를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마가복음 7:32). 이 자는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그를 예수님께 데려와야만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예수님께서 치유의 능력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이 사람은 몸짓이나 글을 통해서 자기 의사를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혼자 힘으로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스스로 나아오려는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데려와야만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람들"이란 누구입니까? 아마도 그 사람의 가족이거나, 친구, 혹은 그를 주변에서 돌봐주었던 사람들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저는 이 장면이 오늘날 우리의 젊은 세대들의 상황에 대해 많은 진리를 밝혀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부모, 친구, 혹은 교회 공동체가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야만 합니다. 귀머거리 청년의 부모처럼 우리는 우리의 자녀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데려가야만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매일 드리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매일의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귀머거리 청년의 부모가 그를 예수님께로 데려왔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들은 자기 아들이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이 얼마나 필요한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간청해도 그 아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 간청을 하거나 아니면 호되게 꾸짖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마음의 생각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그로 하여금 정죄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를 포함해서 많은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잘못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잘못한단 말입니까? 아이들이 왜 자기가 예수님께 나아오려 하지 않는지를 말해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우리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왜 자기 마음의 울부짖음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실상 그들은 영적으로 혀가 묶이고 굳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얼마나 오늘날의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지 어디서부터 측량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이전의 어느 세대보다도 훨씬 더 극심한 일들을 많이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9.11 테러를 경험했습니다. 학교에서의 무차별 총기난사 사건, 백악관에서의 성적인 추문에 대해서도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유명한 설교자가 악한 죄인임이 밝혀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지금은 거대기업 간부들이 탐욕을 채우고자 회계부정 사건으로 엄청난 사기에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삶 어디에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어떻게 이러한 지경에 다다르게 되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먹었는지, 왜 마음의 간절함을 표현할 수 없는지를 알아내려 하는 것은 무익한 일입니다. 성경은 그 귀먹고 어눌한 자가 어떻게 이런 상태에 다다랐는지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출생 때부터 그랬는지 어쨌는지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부모들이 아이에게 자신들이 예전에 무슨 말을 했었는지, 무슨 잘못을 했었는지 알아내려고 하는 것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입니다. 뒤를 돌아보거나, 나중에 후회하거나, 죄의식에 사로잡힐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도 귀먹은 자녀를 듣게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그 사랑이 혀가 묶인 자를 똑똑히 말하도록 만들 수는 없습니다. 자녀들이 진리를 듣도록 확신시킬 수 있는 목사도, 상담원도, 전도사도 없습니다. 그들이 사랑 받는다고, 혼이 난다고, 상담을 받는다고 듣거나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의 귀는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녀들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듣게 하는 유일한 치료법, 단 하나의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께 나아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하거늘"(마가복음 7:32). 여기서 "간구한다"의 헬라어는 "애원하다, 기도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부모는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주님, 우리 아들을 만져주십시오. 당신의 손을 그에게 얹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마가복음 7:33). 예수님은 이 귀먹은 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즉시 아셨습니다. 그는 직접적인 접촉, 자신만의 경험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발견한 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실질적인 경험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과 자신 둘 사이에 일어난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물으시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해를 못하시는군요. 저는 수년 전에 제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 후 그는 다시 예전의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회개하면서 다시 주님께 달려나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착하고, 도덕적이고, 선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는 미지근해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왜 그는 자신을 완전히 주님께 드리려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 완전히 헌신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요?"

그가 직접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는 데 답이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경험, 어머니의 경험, 친구의 경험에 의해 예수님께 왔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간청에 의해 주님께 복종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어느 설교자가 지옥의 불을 묘사하는 설교를 하는 것을 듣고는 무서워서 예수님께 달려왔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그 경험이 오래가지 못한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진리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직접 예수님을 경험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군중들에게서 벗어나 자신만의 접촉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주의 진리는 언제나 주님과의 일대일 관계에서만 드러나는 것인데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여러 해 동안 섬겨오셨다면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초자연적인 만남을 가지셨던 날이나 시간을 회고해 볼 수 있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만지셨으며 여러분은 그것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은 그 경험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얻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설교를 통해서 주입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직접 그리스도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하나님과 함께함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귀먹은 자가 이런 만남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람의 언어, 몸짓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7:33). 저는 예수님께서 그 귀머거리의 귀에 자신의 손가락을 넣게 하시고 그를 지목하시며 "내가 네 귀를 열리라." 외치시는 모습을 그려봅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혀를 내밀게 하시고 손을 대서 만지시고 침을 뱉으십니다. (이는 아마도 혀가 꼬인 사람은 침을 뱉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님은 "내가 네 혀를 묶고 있는 끈을 자를 것이다. 그러면 네가 모든 다른 사람과 같게 될 것이다."라고 암시하신 것입니다.

그 귀먹은 자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상상해 보실 수 있습니까? 그는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분은 나의 언어로 말하고 있어. 이분은 나에게 자기가 하는 말을 이해하라고 요구하지 않아. 이분은 자신이 나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기 원하는 거야! 이분은 내가 당황하지 않도록 나를 군중들로부터 분리시켰어. 이분은 내가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알아. 이분은 사람들 앞에서 과시하려고 하지도 않아. 이분은 내게 질문을 하거나 나를 정죄하지도 않아. 이분은 내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 이분은 내가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 이분은 내가 그의 음성을 듣기 원하며 그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어. 이분은 내 마음이 그를 찬양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 하지만 나는 그분의 기적의 손길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분은 내가 이런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어."

우리의 구세주께서는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똑같이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주님은 그 어느 누구를 데리고도 구경거리를 만들지 않으실 것입니다. 다소의 사울에게 주님께서 얼마나 인내하시고 마음을 쓰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유명한 젊은이는 예수님과의 기적적인 만남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든지 그에게 나타나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은 스데반이 군중들 앞에서 돌에 맞을 때 사울을 쓰러뜨리셨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울의 회심을 견본으로 사용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은 사울이 "군중들로부터 떨어져" 광야에서 실질적으로 홀로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오셔서 초자연적으로 그를 만지신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바울로 개명한 사울은 여러 해 동안 그날의 이야기를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그 자신만의 기적적인 만남을 주셔서 그의 감긴 눈을 여셨습니다.

여러분, 주님과 이렇게 대면하기 위해서 예배당 제단 앞으로 걸어나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의 최선의 역사는 비밀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기도할 때에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은밀한 곳, 골방으로 들어가라. 개인적으로 나를 찾으라. 내가 너에게 숨김없이 보수하리라."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이 사람과 홀로 있으면서 예수님께서는
여느 때와 달리 아주 이상한 일을 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마가복음 7:34). 여기서 탄식한다는 단어는 귀에 들리는 신음소리를 의미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찡그리시고 마음으로부터 신음소리를 내셨습니다. 물론 이 사람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신음소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장면에 관한 여러 주석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중 제가 하나님의 영이 제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믿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천국을 바라보시며 아버지와 교통하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조용히 마음으로, 영혼으로 울고 계셨던 것입니다. 첫째는 오직 예수님께서만 보실 수 있는 이 사람 내면의 무엇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로는 예수님께서 오늘날의 무엇인가를 보셨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맺혀 있는 무엇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신 그 당시와 현재의 무엇이란 정말 무엇입니까? 그 귀먹은 자의 마음속과 오늘날 수만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무엇을 들으신 것입니까? 주님은 소리 없는 외침을 듣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억눌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외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외침으로 신음하셨습니다. 주님은 들리지 않는 모든 자들의 외침에 소리를 부여하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자기 말을 알아듣지 못함으로 이 귀먹은 자가 울며 지샜을 수많은 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의 아버지나 어머니조차도 그가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이 자기 의사를 표현하려 노력했을까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이라곤 어눌한 고통의 소리뿐이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 단 한 번만이라도 말을 해봤으면. 단 1분만이라도 내 혀가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내 영혼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누군가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바보가 아니에요. 저주를 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요. 전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달아나려 하지도 않아요. 그저 혼란스러울 따름이에요. 이렇게 문제가 심각한데 아무도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해요.’라고 큰소리로 외칠 수 있을 텐데."

그러나 예수님은 이 좌절한 한 인간의 마음의 생각을 들으셨습니다. 주님은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모든 내적 신음을 이해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약함을 체휼하고 계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사람이 귀머거리와 벙어리로서 겪고 있는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모든 들리지 않는 마음의 외침 때문에 아버지께서 당하시는 고통을 신음소리를 통해 표현하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육을 입으신 하나님으로서 들리는 소리로는 표현되지 않는 모든 마음의 외침 때문에 신음하셨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아닌데. 예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도 난 알고 있는데.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를 원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혼란스럽지? 왜 나는 마음에 있는 말을 내뱉을 수 없는 거지?"

저에게는 11명의 손자, 손녀가 있습니다. 저는 매일 그 아이들 하나하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요즘 저는 이 중 몇몇을 위해 특별히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중보기도를 통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이들은 다 사랑 많은 부모 밑에서 자라고 있는 착하고 순종적인 아이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있으며 부드러운 마음씨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들이 소극적이라는 것을 압니다.

최근에 저는 이들과 한 명씩 따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들어오고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할아버지가 널 위해 기도하는 거 알지? 너희 부모님이 너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알고 있지? 우리도 네가 얼마나 마음 깊이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단다. 그런데 왜 그렇게 소극적이니? 할아버지는 네가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구나. 네가 성경을 읽는지, 기도는 하고 있는지 할아버지는 잘 모른단다. 할아버지에게 네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해 주겠니? 뭐 문제되는 게 있니?"

즉시로 아이들은 움찔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제게 말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 하나님이 싫은 게 아닌데요. 그저 혼란스러워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저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물어야만 했습니다. "대체 무슨 일인가요? 뒤범벅이 된 소리, 열망의 외침이 들립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제게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게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어하는데, 전혀 되지가 않습니다."

저는 수많은 다른 젊은이, 청년, 학생들도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외침을 소리 내어 설명할 수 있다면 아마 이렇게 들릴 것입니다. "저는 교회의 위선을 너무 많이 보아왔습니다. 경제계에서도, 학교에서도, 정치에서도, 모든 곳에서 그런 위선이 보입니다. 저는 여자친구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친구들과도 그렇고요. 이 모든 것들이 나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무에게도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관대한 편이시지만 전 이 문제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런 외침을 듣지 못합니다. 인간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더더구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마음과 마음으로 하는 대화도 들리지 않는 귀를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단 한 가지 해결책이 존재할 뿐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무릎으로 예수님께 데려가야 합니다.


얼마 전 한 젊은이가 기도 예배 중에 제단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는 몸을 떨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는 워싱턴주에서 왔다고 내게 말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우연히 우리의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배에 참석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배당을 나가서 어느 콘서트에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들어가자마자 그곳에서도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예배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기도를 원했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자네 부모는 예수님을 믿으시나?" 그는 "예, 저를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 젊은이가 우리 교회에 오게 된 것이 "우연"이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의 직접적인 만남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강요하거나 애원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는 예수님께로 인도되어 왔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저는 그 부모의 끊이지 않는 열정적인 기도를 통해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확신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 이는 열리라는 뜻이라 그의 귀가 열리고 혀의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더라"(마가복음 7:34-35).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위해 개인적인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이 귀먹은 자가 들은 첫 번째 소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그가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시기 위해 그에게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어떤 이야기들을 했을지 뻔하지 않습니까! 그의 입에서는 여러 해 동안 묵혀두었던 마음에 담아둔 감정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전에는 소리 낼 수 없었던 내면의 외침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께서 그들로 인해 신음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데가볼리에 있던 단 한 사람을 인해서 신음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저의 자녀들, 구원받지 못한 여러분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억눌린 내면의 외침으로 인해 울고 계십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방식을 바꿔야 하는 분들도 있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과 동행하시고, 그들에게 간청하시고, 가까이 다가가시고, 그들을 깨어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새롭고 신선한 열망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 아이와 저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수많은 무리에게서 떼어내소서. 그들을 주님과 단둘이 있게 하소서. 그들에게 주님의 만지심을 주소서. 그들로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각성을 갖게 하소서. 깊고도 기적적인 주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그들에게 있게 하소서."

이제 경고의 말씀으로 설교를 마치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영적으로 귀가 멀었습니까? 입이 닫혀 예수님에 관해 잘 이야기하실 수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가는 법을 압니다. 여러분은 주께서 여러분의 외침을 들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이 주님과 단둘이 있을 장소를 찾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께서 여러분께 가까이 다가오시도록 바로 지금이 주님을 가까이할 시간입니다(야고보서 4:8).

누가복음 18장에서 우리는 기도하러 성전에 갔던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뒤에 홀로 섰습니다. 그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지도 못하고 그저 가슴만 칠 따름이었습니다(누가복음 18:13). 그는 몸으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제 마음의 외침을 들어 주십시오. 이 공허함에 지쳤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누구신지 직접 알기를 원합니다. 주님만이 제 마음속을 이해하십니다. 주님만이 제가 겪고 있는 것을 아십니다. 주님, 저는 모든 것이 막혀 있어서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 당신의 손길, 만지심이 필요합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저는 가련한 죄인입니다."(누가복음 18:13)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누가복음 18:14)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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