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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rst Love : As You Have Never Seen It Before -

첫 사 랑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사도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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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vid Wilkerson
Undated
__________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요한계시록을 너무나 신비스럽다며 회피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요한계시록 1:3).

비록 요한에 의해 기록되었지만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요한계시록 1:1). 계시록은 그리스도에게 주셨고 요한에게 지시하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요한은 예루살렘 교회의 세 기둥이 되는 인물 중 한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요한에 관해 알고 있는 많은 부분은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Polycarp)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이래니우스(Iraneus)의 기록 덕분입니다.

우리는 주후 64년에서 69년 사이에 네로 왕에 의해 순교한 바울 이후에도 요한이 생존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다섯 교회 중 적어도 두 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졌고 그의 사후에 요한이 남은 생애를 에베소에서 보냈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있는 교회에 보낸 요한의 편지를 볼 때 요한은 그곳의 교회들을 감독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도미시안 황제에 의해 밧모섬으로 유배되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이후에는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때쯤 로마제국은 혼돈에 빠져 있었습니다. 네로는 제왕의 화려함을 갖춘 도시로 로마를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을 그 도시에 부여코자 스스로 로마를 불태웠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비열하게 다루었으며 화재로 인한 엄청난 살상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뒤집어 씌웠습니다.

한번은 자신의 정원에 있는 기둥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매달아서 기름투성이의 타르를 사람들의 온몸에 바르고는 불을 붙였습니다. 한 역사학자는 밤을 밝히며 끔찍한 형상으로 타 들어가는 시체의 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 네로는 대단히 기뻐하며 말을 타고 달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인해 순교하였습니다.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요한은 그리스도의 몸이 당하는 고통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주님과만 교통 하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계시가 그에게 임했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낸 메시지는 교회의 “사자들” 즉 목사, 지도자, 설교자들에게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내가 여러분과 나누려고 하는 것은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알아야 하고 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배교에 대해 드러낸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주의를 기울여서 전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진정한 계시는
그리스도의 두렵고 위엄이 넘치는
거룩함을 봄으로써 시작됩니다.


요한복음 13장 23절에서 우리는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는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가슴에 친밀하게 안겨있는 그 제자가 바로 이 요한입니다. 요한 만큼 예수님이 자애로운 분이심을 아는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밧모섬에서 요한은 놀라운 거룩함을 입으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요한계시록 1:12-15).

요한은 이제 자신의 머리를 그리스도의 가슴에 대고 눕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는 이제 인간의 모습을 입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거룩함을 입고 계셨습니다. 요한은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라고 말했습니다(계시록 1:17).

다니엘은 이와 똑 같은 두려움을 주는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을 보는 것 만으로 온 몸에 힘이 빠져버렸고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버렸습니다. “그 때에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본즉 한 사람이 세마포 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우바스 정금 띠를 띠었고 그 몸은 황옥 같고 그 얼굴은 번갯빛 같고 그 눈은 횃불 같고 그 팔과 발은 빛난 놋과 같고 그 말소리는 무리의 소리와 같더라”(다니엘 10:5-6).

다니엘은 “나와 함께한 사람들은 이 이상은 보지 못하였어도 그들이 크게 떨며 도망하여 숨었었느니라 그러므로 나만 홀로 있어서 이 큰 이상을 볼 때에 내 몸에 힘이 빠졌고 나의 아름다운 빛이 변하여 썩은 듯하였고 나의 힘이 다 없어졌으나 내가 그 말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소리를 들을 때에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깊이 잠들었었느니라”(다니엘 10:7-9).

우리는 복음이 경박해지고 성령의 역사를 코메디처럼 극화 시키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성경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잠언 29:18). 저는 그 묵시가 그리스도의 거룩한 위엄에 대한 계시를 의미한다고 받아들입니다. 이사야도 거룩함을 입은 그리스도를 보았을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이사야 6:1-5).

이 시대에 경외감을 일으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희미하게라도 목격하고 그 얼굴이 창백해져서 제단으로 나아와 여러 시간 동안 그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목자들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 두려운 광경에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을 본 모든 하나님의 종들, 요한, 다니엘, 이사야에게서 생겨났던 두려움이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 주님의 이름을 가벼이 여긴 것에 대한 두려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얄팍하고 희극적으로 대한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람들의 목전에서 주님을 거룩히 여기지 못한 것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이 친밀감이라고 부르는 것을 저는 무례함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뻔뻔하고 무례해 졌는지요! 어떤 설교자들은 얼마나 뻔뻔해졌는지 거룩한 제단에서 자신들의 약삭빠른 어리석음, 바보 같은 꿈, 하나님을 모독하는 농담 등을 홍수같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 그리스도를 우리와 비슷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간절히 필요한 것은 주님의 불타는 눈을 한번이라도 주시하는 것, 주님의 타는 듯한 거룩함을 보는 경외감입니다. 그러면 결코 다시는 주님의 임재 가운데 거만하거나 어리석은 자와 같지 않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함을 진정으로 보면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부족한지가 드러납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요한은 무엇보다 먼저 에베소 교회의 상태를 논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요한계시록 2:1,2,6).

에베소 교회는 주님께서 부분적으로 칭찬하시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여기 복음을 위해 애써 인내한 성도들의 무리가 있습니다. 그들은 사악함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분별력이 있어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호도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 인내하였습니다. 그들은 지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니골라당의 행위와 교리를 그들이 미워한 사실에 주목하셨습니다. 일곱 교회에 보내는 요한의 편지에서 두 번이나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배교자들의 가르침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미워하시는지 언급하고 계십니다(요한계시록 2:15).

니골라는 사도행전 6장 5절에 과부들의 필요를 감독하는 자리에 선택된 일곱 집사 중 한 명으로 처음 소개가 됩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사도행전 6:2-6).

교회는 그를 영적인 사람, 성령과 지혜로 가득한 자로 보았습니다. 사도들에 의해서 그는 안수를 받았습니다. 니골라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길래 그들의 가르침과 삶의 방식에 그토록 가혹한 저주가 내려진 것일까요?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은 성도들에 대해 두개의 중요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를 먹지 않는 것과 간음을 피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니골라는 우상숭배와 간음을 조장하는 교리를 창시했음이 분명합니다. 당시의 사회는 난잡한 성생활에 관대했습니다. 니골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그릇된 평안의 교리를 만들어 결국 그들의 가르침 속에 세상과 음탕함의 흐름을 혼합 시키는 결과를 낳았던 것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니골라당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자기 탐닉의 삶 속에서 동물처럼 자신들을 쾌락에 내어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구별되기를 거부했으며 음행과 간음을 저지르면서 제단에서는 눈물을 뿌렸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들의 사랑에 관해 너무나 달콤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그들의 손과 마음은 항상 죄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니골라당의 영은 아직도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 크리스챤 록그룹과 록음악의 교리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마귀가 조종하는 음악 세계라고 하는 오물과 진창으로 끌고 들어갑니다. 그들은 제게 쓴 편지에서 달콤하고 경건한 말로 그들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지, 아무도 예수님을 데려가지 않는 곳에 어떻게 자신들이 예수님을 모셔가는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 명예, 음욕에 눈이 멀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금하신 곳에 그들과 함께 가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거나 모르고 있습니다. 그 편지는 사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만약 그들이 사탄의 땅으로 가서 죽음의 언어, 성령께서 기름 부으시기를 거절하신 말을 전한다면 사망을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그들 모두는 타오르는 불꽃과 같은 눈으로 그들의 오만한 자존심을 꿰뚫어보시며 사망의 편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이끌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한 이유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시는 거룩한 왕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이 현대의 니골라당은 대담하게도 위엄의 거룩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소심한 노래, 거짓 설교, 고통도 없고 지불할 대가도 없는 초대를 축복하실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들은 주님을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창피해서 분명하고도 뚜렷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의 메시지를 노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혹되었으며 믿음의 젊은 세대를 통째로 현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종들은 백성들에게 그 죄를 드러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이 세대의 새 선지자라고 제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그들에 관해 “사악이 예루살렘 선지자들에게로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고 말하였습니다(예레미야 23:15).

이러한 록음악 가수들 중 많은 이들이 오순절 교회의 성도이며 목사들로부터 축복과 격려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저는 섬뜩했습니다(번역자 주: 윌커슨 목사님도 오순절 계통임). 우리의 목자들이 그토록 눈이 멀었단 말입니까? 목회자들을 향한 에스겔의 천둥을 치는 듯한 메시지를 그들은 들은 체 만 체 하는 것입니까?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에스겔 44:23).

목사님들이여 깨어나십시오! 성도들이여 일어나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토록 미워하시는 니골라당입니다. 우리도 이것을 미워해야만 합니다.


죄와 싸우고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면서도 첫사랑을
읽어버리는 것이 가능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죄에 대해 단호했습니다. 그들은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 밝혀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포기할 생각은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책망할 것이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요한계시록 2:4).

하나님께서는 이 첫사랑의 문제를 너무나 심각하게 받아들이셔서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그들에게서 제거하시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그릇 이해되고 있는 구절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관해 이야기하고 계신 바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 초기 주님과의 경험을 회복하고자 애쓰며 평생을 보냅니다. 우리는 첫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처음 구원을 받았을 때의 열심, 열정, 흥분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젊은 시절의 열정을 잃어버린 것으로 인해 슬퍼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이 식어지고 말라 버린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보다 순진했던 때로 돌아간다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충분한 영적상태는 아니며 그러한 상태는 이 구절의 보다 깊은 진리를 표현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상태로 돌아가서는 안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기심에 의해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기 원했거나, 축복을 받기 원했거나, 치유를 받기 원했거나, 혹은 단순히 마음의 평안을 원해서 믿음을 가졌습니다. 저는 저의 초기 신앙으로 돌아가기 원치 않습니다. 그때 저의 사랑은 미숙했습니다. 제가 가진 사랑은 지혜와 경험도 부족했습니다. 저의 열정은 많은 고통을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헌신이라기 보다는 감정적 열정이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 합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로 된 지금의 저 자신에 못 미치는 그 어떤 상태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인들이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지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인내함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열정, 주님의 이름에 대한 경외감도 잃지 않았고 주님을 위한 일에 게으르지도 않았습니다.


에베소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도들의 사랑을 잃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처음 사도들의 교회가 가졌던 사랑으로부터 이 교회가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지를 주님의 교회에 드러내고 계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올바른 교리를 갖추고 있다. 너희는 내 일을 행하는데 헌신하였다. 너희는 거짓 선지자에게 속지 말라는 말씀에 뿌리를 박고 있다. 너희는 모든 명령을 간직하고 있다. 너희는 칭찬 받을 만한 자선행위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향한 사도들의 사랑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모든 역사에 애착을 갖고 있지만 정작 그 역사를 불러일으킨 동기가 된 그리스도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은 잃어버렸습니다. 그 첫사랑은 매우 실질적인 방법으로 나타났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즉각적인 재림에 대한 사모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들은 영원한 영광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을 갈망하였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영적 갈망으로서 거룩한 주님의 형상을 닮아 주님의 임재 가운데 완전한 교통을 이루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기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즉각적인 재림에 대한 약속의 점진적인 망각과 그 약속의 성취에 대한 믿음의 상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얽매이지 말라는 주님의 경고를 내팽개쳤고 깨어 기도하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주인을 기다리는 종처럼 등불을 들고, 기름을 준비하고, 긴장한 상태로 굳건히 서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더 이상 우리의 주요한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는 물질주의의 파도에 너무나 몰두해 있습니다. 우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인내함으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십자가”를 지는데 지쳤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몰아내거나 아주 먼 장래의 일로 미뤄놓음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깨어있거나 경계할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그 결과 모든 신부들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토록 엄청난 우상숭배와 무사태평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기이하지 않습니까?

저는 어느 누구와도 “휴거”와 같은 교리에 대해 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것이라곤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한 자를 악한 종이라고 부르실 때 제가 두려워 떨 것이라는 것 뿐입니다(마태복음 24:48). 주님께서 홀연히 오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한 밤 중의 도둑과 같이 오시겠다는 뜻을 전하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는 의의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저는 커다란 슬픔과 시험이 다가오고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야 할 경고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다는 것도 믿습니다. 그러나 저는 동시에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영광의 구름을 타시고 홀연히 임할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습니다.

교회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이 용솟음치게 하는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요한계시록 22:20). 초대교회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선포하였습니다(마태복음 24:24).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재림을 늦추시고 계십니다. 갑자기 아무 때나 오시지는 않을 것입니다”라는 메시지들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입술로부터 우리가 직접 들은 메시지는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는 것입니다(마태복음 24:44).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들으십시오.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사도들의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가운데, 깨어, 사모하는 가운데 의로운 삶을 사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이 커다란 시험을 겪을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무엇이든지 준비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직접 베드로에게 주님의 재림에 대한 사도들의 사랑이 있는지를 시험하셨습니다.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 21:15-17).


그리스도께 드리는 열정적 헌신이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가르치거나 설교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런 의미로 말씀하셨다고 믿습니다. “네가 나를 부인함으로써 너의 형제들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 너의 부인은 형제들을 흔들어서 너의 헌신의 부족함과 비겁함을 보게 하였다. 이제 네가 나를 향해 지극한 사랑을 보인다면 그것으로 네 형제들을 먹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소망과 필요를 그 사랑으로 먹이라”

교회는 성도들의 양식이 될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한, 그리스도를 온전히 사랑하는 모범이 될 만한 자들을 더 많이 필요로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들의 모범이 저의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제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제 안에 아주 깊은 것을 채워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저의 갈급함을 적셔줍니다. 그들의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헌신과 사랑은 제 안에 소망을 창조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지 저는 설교와 삶이 다른 목사와 선생들로부터 받는 영적 양식보다 훨씬 더 영적인 양식을 거룩하고 헌신 된 삶을 사는 평범한 성도로부터 얻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저로 하여금 공허하고 메마르게 합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결여와 부족이 저로 하여금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미지근합니다. 그들은 추운 겨울날 제 얼굴에 얼음물을 붓는 것과 같은 영향을 제 영혼에 끼칩니다. 그들의 축 늘어진 영혼은 제게서 무엇인가를 앗아갑니다. 그들에게 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먹이고 있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떡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여러분은 영적인 양식을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형제로써 진심으로 사랑하는 자가 전심으로 주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저는 주님을 가장 사랑함으로써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은 소망과 생명을 주는 본보기로 빛의 횃불이 되어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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